생강의 모양 _ 박천욱, 2015
난지아트쇼_생강의 모양 – 기획전시서문 2. 둘부터 시작 우리는 “미술”의 시작을 함께 하지 못했다. 이미 많은 미술사적 토대와 작가, 사회로부터 그 바탕은 쌓여져왔고 그 위에 시작하게 된다. 내가 결정하지 않은 모양 위에 시작된 미술은 자유롭기 힘들다. 혹 작가가 이전의 미술과 관계없이 본인만의 세계를 구축해 간다 해도, “미술” 안에서 평가되기에 순수하게 자유로울 순 없을 것이다. 현대미술에 이르러 작가는 수많은 담론과 기법, 의미, 사회적 배경의 틀 안에서 새로운 틀을 찾아 내기위해 독창성과 창의성의 발현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그리고 평가 받는다. 평가는 상대적이다. 간혹 미술에 있어 절대적 평가를 갖길 바라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듯하다. 가치기준은 변하고 상대적이다. 기준은 어떻게 정해지는 것일까? 현대미술에 와서 그 기준은 더 모호해지는 듯하다. 3. 생강의 모양 생강은 그 모양이 모호하다. ‘생강이 어떻게 생겼지’라는 질문에는 어떤 확고한 상이 그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생강은 그 역할과 쓰임새가 분명히 있고, 제각각의 다양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언뜻 그려지지 않는 미술의 지형도를 생강의 모양으로 상정한다. 마찬가지로 미술은 분명히 있지만 그 모양이 모호하다는 은유이다. 전시는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밖으로부터 기획되었다. 매년 수많은 작가들이 지원하고 어떤 기준에 따라 입주 작가가 결정된다. 선택된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세계를 ‘인정받았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 선택되지 못한 작가들은 ‘어떤 기준으로’ 결정했을까 라는 의문을 갖는다. 4. 쓰이지 않는 경력 작가들의 경력을 살펴본다. 개인전, 단체전, 공모선정, 작품소장, 수상, 레지던시 등을 미술활동의 이력으로 적는다. 이 내용들 또한 어디선가 ‘인정받은’ 이력이다. 그러면 ‘드러나지 않는’ 이력에 대해 살펴보자. 실패의 경력들……. 한 작가의 작품세계가 어디선가는 인정받음과 동시에 어디선가는 인정받지 못하는 사실. 이는 물론 공모주체의 성향이나 사회적 배경 등의 요소들이 작용하거나, 혹은 작가의 경력에 따라 이전작업의 양과 질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동일한 포트폴리오로 같은 시기에 지원한 공모의 다른 결과들은 실패이력이 성공이력의 반작용이라 말하기 적합하지 않은듯하다. 다시 말해 실패를 딛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는 기준의 다름이다. 이 전시를 관람자로서 보게 되는 작가는, 전시의 소재가 된 작가의 실패들로 잠시 위로를 받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위로는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1. 다시 하나 우리의 공통된 시작은 아마도 입시 미술일 것이다. 미술대학에 진학하기위해 습득한 실기능력은 현재의 미술과 얼마나 다를까? 작가들이 지금 하는 미술과 그들의 처음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살펴보고자한다. 실기시험에 참여한 작가들은 각자 자신이 시작했던 입시미술 방식으로 애매한 현대미술의 상징인 생강조형물을 그리거나 만들어냈다. 그들의 입시미술 실력과 현재 작가로써의 실력은 상관관계가 있는가? 시작이었던 미술은 현재 작가가 표현하고 있는 작품 활동과 상관관계가 있는가? 한 작가에게 주어진 평가의 기준은 입시미술부터 현대미술까지 얼마나 바뀌어 적용 되는지, 그 기준은 무엇인지, 실은 미술이 발전한다고 얘기하기 어려운 것처럼, 어떤 기준이 유행을 타듯 계속 변화하기만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5. 국공립 미술 미술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아마도 미술의 시작은 작가로부터일 것이다. 작가가 있어야 미술관도 문화재단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미술은 미술관이 있어야 작가가 존재 할 수 있는 상황으로 역전되었다. 현대미술 안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현실을 살아가자면, 국공립에서 작품을 사줘야하고, 작업실을 내어주며, 전시기금을 지원해줘야 한다. 한국의 현대미술 작가들은 국공립 없이 살아가기 힘들다. 그 평가기준은 자꾸만 모호해지는 것 같은데, 평가 받을 일은 계속 늘어난다. 6. 비겁한 은유 전시는 기본적으로 ‘작가들을 위한’ 전시이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그들의 작품세계와 전혀 상관없는 방식으로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의 방식으로 미술의 모양을 그려나감이 아닌,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려져 온 미술의 모양을 돌아보기 위함이다. 국공립의 지원 아래 작품의 ‘생산자’ 역할에서 벗어나, 국공립의 지원으로 기획한 전시를 ‘소비’하고자한다. 전시는 개막당일 작가들에게 유희를 제공하는 파티와 함께 할 것이다. 전시는 또한 구체적이며 설명적이다. 해석의 여지를 열어두는 현대미술의 현실과는 반대로 모호함에 대한 구체적인 실험들을 제시하며 당당해지고자한다. 그것이 비록 비겁한 은유일지라도. 모호함을 해석 하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전시기획의도는 단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박천욱 (작가) |